1997년 뇌출혈 수술 후 의식 없는 환자의 아내가 의료진 반대에도 환자를 퇴원시킨 일이 있었다.
환자는 결국 집에서 죽음을 맞았고, 1심 재판에서 아내는 살인치사죄, 의료진에게는 살인방조죄가 선고됐다.
집에서의 임종을 위해 가망 없는 환자를 퇴원시켜왔던 우리 사회의 관행은 일시에 경직됐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목숨 연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연명 의료가 새로운 관행으로 정착됐다.
시간이 흘러 2009년 세브란스병원에서는 인공호흡기를 단 채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던 김씨 할머니의 가족들이 병원을 상대로 연명 의료 중단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김씨 할머니가 생존 가능성이 없는 임종 과정에 있고, 평소 무의미한 치료를 원치 않았다며 인공호흡기 제거를 판결했다.
더불어 연명 의료 중단에 대한 빈번한 요구를 일일이 법원이 판결할 수 없으니 현장에서 해결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을 권고했다.
이후 정부 주도하에 전문가들이 모여 일명 ‘연명의료결정법’의 초안을 만들었다.
이는 2016년 국회 통과 후 2018년부터 본격 시행됐다.
법 제정 후 가장 큰 변화는 연명 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또는 ‘연명의료계획서’를 미리 작성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75%가 병원에서, 그것도 중환자실 연명 의료를 받으며 질질 끄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현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법의 취지는 연명 의료 대신 호스피스를 선택하게 하고, 생애 말 가족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지만 이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호스피스 기관이 적고 아직 말기 암 등 일부 질환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또 말기 환자가 집에서 고통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돕는 방문 진료와 간병 지원 역시 매우 취약해 환자와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병원 입원을 선택하게 된다.
무엇보다 말기 환자도 연명 의료 대상이며, 죽음이 임박한 임종 과정에 들어서야 연명 의료 중단이 가능하다는 게 법의 맹점으로 꼽힌다.
집에서의 돌봄은 불가능하며, 호스피스의 문은 좁고 임종 직전에야 연명 의료에서 해방되는 이 법은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일까?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만 작성하면 존엄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라 안심하고 있다.
박중철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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